회로 영화

사람들은 인터넷으로써 비로소 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인간관계를 실질적으로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우리가 웹상에서 만나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다. 나 역시 인터넷을 할 때 인터넷에서의 나는 내가 아니다. 언문일치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현실에서의 말과 문자의 말에 괴리가 발생하고 그러다보면 언행의 성격 자체가 달라지며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인터넷 세계에서의 연결은 현실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전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전혀 다른 아이덴티티로 접속한 실체를 모르는 타인과의 연결망을 형성하여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은 다시 보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공허한 공간인 것이다.

SNS의 발달은 인터넷은 물론 우리의 삶의 전반에 마저도 많은 변화를 야기하였다. 일단 작은 것 같으면서도 큰 부수적인 변화를 일으킨 변화는 본인의 일상을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도 보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전엔 인터넷에서 공개된 공간에서는 이를테면 영양가 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이트가 아니면 그곳을 방문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 웹사이트의 관리자의 일상적인 모습을 궁금해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담화의 교류의 장은 비공개적이고 폐쇄적인 예컨대 동아리와 같은 곳에 국한되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제는 일면식 없는 타인의 삶에까지도 어느 정도의 접근의 권한이 보편적으로 쥐어졌다. 트위터를 예로 들자면 정보를 공유하려는 목적으로 본인의 지식을 배포하거나 그로써 계몽하려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은 더 이상 환영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타인과의 의견 교류를 활발히 하는 사람, 더 나아가 일상적인 생활의 동선까지도 낱낱이 함께 공유하는 사람이 환영을 받는다. 같은 의견을 함께 하는 사람끼리 뜻을 같이 하여 어떤 정치 단체를 만들기도 하고 생각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서 친목을 도모하기도 한다. 취향이 맞는 사람과는 따로 만나서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하며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과는 이웃사촌이 된다.

결국 인터넷은 자기-PR의 장이 된다. 자신만의 어떤 관객을 상정해서 스스로를 포장하기 위해 본인의 생각인지 인용인지 알 수 없을 어려운 말들을 가져다 쓰며 나는 이런 사람이오를 선언한다. 나는 이런 취향을 갖고 있다, 나는 어디서 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의견을 갖고 있으며 당신의 의견도 포용할 자세가 되어 있다. 목적은 당신은 나와 친해져야 한다라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무대에 선 광대는 관객이 없으면 공연을 할 이유가 없다. 광고는 보는 사람이 없으면 방송을 멈춘다. SNS계정은 더 이상 봐주는 사람이 없을 때 생명력을 다한다.

밖에 나가는 시간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길어진 순간부터 웹상의 아이디는 천천히 현실의 인격을 잠식한다. 누구든지 언제든 구독하여 볼 수 있는 SNS의 발달로 모종의 관음증적인 증상이 팽배해지게 되었는데 누군가를 저만치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보이길 열망하는 사람들, 자신을 보는 사람이 없으면 불안을 느끼는 노출증 환자, 이른바 관심병 종자들이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인격과 인터넷에서의 그것에 혼동을 느낀 탓일 게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상과 사진을 올리며 올라가는 조회수에 스스로의 존재를 재확인한다. 아무 반응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악성댓글을 받기를 바란다


붉은 천사 영화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붉은 천사>는 중국 톈진의 야전 병원에 파견된 니시라는 젊은 간호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니시는 처음 병원에 파견된 날 사카모토라는 군인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바로 최전선에 보내진다. 그런데 2개월 후 그녀는 전선에 파견되어 그를 다시 만난다. 그는 살아있었지만 수혈을 해도 살 가능성이 낮아서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를 불쌍히 여긴 니시는 군의관에 부탁하여 수혈하게 한다. 군의관은 그녀에게 밤에 그의 방으로 찾아온다면 부탁에 응해줄 것이라고 하였고 니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지만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톈진으로 돌아와서는 팔 양쪽이 잘린 상태에서 이제 아픈 곳은 없으나 전쟁에 대한 이미지 실추를 우려한 정부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환자를 만난다. 다시 측은지심을 느낀 그녀는 그 환자의 자위행위를 도와주고 급기야는 호텔에 데려가 섹스 자원봉사자를 자처하기도 한다.

여러 부분에서 김연수의 단편소설 <뿌넝숴>를 생각게 한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중국인이 부상을 당하고 낙오되어 구호 표시를 했는데 그것을 본 한 명의 조선인 간호사가 그를 간병하다가 서로 사랑에 빠진다. 간호사는 본인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남자를 계속 수혈해주다가 결국 1리터의 피를 빼고 죽는다. 간호사 역시 니시와 마찬가지로 부상당한 군인과 사랑을 나누는데 니시의 경우는 동정심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조선인 간호사는 정말 그를 사랑하게 되어서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띤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둘의 헌신은 모두 동정심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점 말고도 소설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뿌넝숴>의 화자, 즉 부상당한 군인이었던 사람은 글로 쓰인 역사를 읽는 행위의 불합리함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몸소 역사를 겪은 자들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고 해도 역사를 만드는 자들은 논리를 적용해 앞뒤를 대충 짜 맞추고는 한 편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단지 책에 씌어진 것이라면 어떤 거짓이든 다 믿으면서 사람이 말하는 것이라면 때로 믿지 못한다. 역사는 단지 철저히 승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선택적으로 씌어진 것이므로 따라서 우리는 결코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는노력을 해야 한다. 이를테면 분명 일어난 일이지만 기록으로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위안부 강제 징용과 같은 일들은 따라서 이미 쓰인 역사 저편에 지금까지 들려오지 않던 목소리를 찾아가야 제대로 청산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의 역사 기술의 관점에는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는 두 부류가 있는데 민족주의적 시각과 실증주의적 역사학의 시각이 그것이다. 민족주의적 관점에 의거하여 보면 먼저 일본의 입장은 전쟁시의 매매춘은 매우 보편적인 일이며 당시 그 여성들은 고소득을 노린 창녀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합법적인 공창 제도가 있었으며 따라서 위안부 제도를 운영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은 공식 기록에 없기에 일본 민족주의사학은 그 사실을 부정한다. 더 나아가 전쟁이라는 상황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평화 상태의 시각에서 군인의 강간 행위에 잣대를 대는 것은 부당함을 강조한다.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에서는 위안부 징용을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본다. 일본군들이 잡아간 여성들의 평균연령은 14세가 안 되었는데 그것은 곧 한국 여성의 정조를 짓밟은 것이다. 여기서 순결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데 인권 침해이기 전에 정조의 침해 즉 민족의 정체성을 더럽히는 행위로 보는 것이다. 양국의 민족주의적 관점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남성을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존재로 보며 여성은 그러한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보며 남성에 비해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이 깔려 있지만 사실상 남성을 여성에 완전히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오류를 범했다.

실증주의 사학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추구하며 구술 자료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역사학자나 당시 기록했던 사람이나 모두 사회적 환경과 관습 등에 자유로울 수 없기에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 결국 문자 기록이든 구술 증언이든 완벽한 객관성을 결여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대안적 역사 기술 관점으로서 따라서 여성주의적 시각이 부각된다. 젠더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분석하는 성지향적 관점은 성노예 문제를 대국적인 협상의 차원이 아닌 범국가적, 범민족적 차원에서 여성의 공통적인 이해가 필요함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자칫하면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문제를 간과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여성주의 운동의 관점은 위안부 문제를 보다 다각적으로 바라보며 젠더문제와 민족문제, 식민주의 문제를 모두 포섭한다. 무엇보다 남성주의적인 관점의 기존의 역사학이 조명하지 못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어 씌어지지 않은 역사를 읽는 운동에 적합한 부분도 있으며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것이 아닌 상호독립적인 것으로 보기에 위안부 문제의 기저에 깔린 가부장적 기제에 대한 논의에도 보다 적합해 보인다.


아워 뮤직 영화

영화의 한 움직임을 ‘1초에 24개의 죽음이라고 표현하듯이, 이미 한 번 지나간 움직임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죽은 이미지이다. 죽은 이미지와 새로 탄생한 이미지들의 교차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기에 우리가 보고 지각한다고 믿는 것은 기실 찰나적 순간들의 경험의 총체이며 우리의 기억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들 역시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영상이라기보다는 각각의 스냅사진들이 연속적으로 한 데 묶인 쇼트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쇼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적인 의미, 다시 말해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의 진실성을 담보할 수는 없는 것은, 마치 박물관에 진열된 작품들이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맥락을 결여해 아우라를 상실한 것과 같이 기억 역시 그 상황에서 전혀 동떨어진 맥락에서의 떠올린 단편적인 쇼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편들은 아무리 더 기억해내서 모아낸다 하더라도 단편들의 합이 곧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미 지나간 사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떠올림이나 재현은 불가능하다.

 

영화의 첫 부분 지옥편에서는 베트남, 중동, 발칸 반도 등에서 벌어진 전쟁과 제2차대전 당시의 푸티지들을 보여준다. 그 전에 대홍수 이후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인간이 등장하였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여 동물들이 쏟아지는 물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에 곧바로 무기를 든 인간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흡사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유인원이 던진 뼈다귀가 우주선이 되어 나타나는 시퀀스를 연상시킨다. 처음에는 온갖 폭약들의 향연이 주를 이룬다. 영화와 보도자료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이는 영상들이 불규칙적으로 뒤죽박죽 몽타주 되어 보여진다. 간혹 정치인들의 모습도 보이며 어떤 장면은 그 의도를 알 수 없이 슬로모션으로 나온다. 폭발과 대량살상 무기로 인한 학살 장면에 맞추어졌던 초점은 뒤에 가서는 살상의 피해자들에게로 천천히 옮겨 간다. 앞부분에서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피아노 음악은 음악이라고 칭하기도 꺼려질 정도로 화성이 맞지 않는 불협화음의 연속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피아노 음들의 조합은 곧 전혀 맥락 없는 푸티지들의 몽타주와 조응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따로 떼어져서 고유의 아우라를 상실한 단편적인 영상들이 한 데 모여 불협을 이루는 것이 마치 여러 키의 화성에서 떨어져 나온 음들이 부좌화를 이루며 불협화음을 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실상 몽타주 되어 보여지는 영상들은 사람들을 살해하는 무기와 폭약들의 향연 외에는 이렇다 할 공통의 요소가 없는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사건들의 단편적인 기록물 혹은 재연물들인데 배경음악의 불협화음 역시 모두 피아노 소리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각각 다른 코드에서 나온 개별적인 음들이라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런데 지옥편에서 무기와 살상, 폭발에 맞춰졌던 초점이 점차적으로 희생자들 개개인에게로 옮겨지면서 배경음악 역시 천천히 화성을 갖춘, 음악다운 음악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전쟁과 학살, 대량살상에는 동기가 제각각이며 그 주체들도 모두 다르지만 결국 그로 인해 피해를 입고 희생당하는 자들은 너와 나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은 인간들일 따름이라는 것을 역설하고자 하는 바로 해석 가능하다. 가해자가 희생자가 되고. 희생자는 다시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의 고리는 전쟁이 계속되는 한 결코 끊이지 않고 존속할 것이다. 결국 나는 남이 된다.’ 우리가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을 용서해준 것과 같이 그들 역시 우리를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지옥편은 끝이 난다.

 

우리는 죽음을 가능성의 불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다. 죽음으로써 가능했던 일들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리는 것, 그리고 죽음으로써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 용서는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것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 죽은 이미지에 불과하여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로 되돌아가는 방법뿐이지만 불가능하다. 하지만 죽음에 도달하게 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교차되는 악순환의 고리는 결국 끊어지기에 죽음 앞에서는 같은 인간으로서 용서의 불가능성은 다시 가능성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모종의 통과의례를 고다르는 다음 에피소드 연옥편에서 제시한다. 연옥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해 불로써 단련받는 곳을 가리킨다. ‘지옥편에서 지난날들의 참혹한 비극과 과오를 보여주었고 연옥편에서는 현재의 상황을 보여준다. 지난날의 과오들, 2차대전과 유태인 학살, 베트남 전쟁 등은 단지 역사의 한 단막으로서 끝맺음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까지도 그 망령이 세계의 여기와 저기에 도사리고 있다. 고다르는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숱한 군사적 대립들 중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유태인 탄압과 전쟁이라는 크나큰 잘못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고 바로 세우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은 지금, 피해자였던 유태인은 완벽하게 가해자의 위치를 탈취하여 그들이 받았던 고난 그대로 혹은 몇 배를 되갚음하고 있다. 고다르가 현재 존재하는 여러 가지 국내적 내지는 대외적 군사대립들 중 팔레스타인 문제를 주제로 다룬 것은 바로 이러한 악순환적 고리를 타파해야 함을 역설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다르 직접 연기한 고다르는 사라예보에서 열리는 유럽문학제에 텍스트와 이미지라는 주제의 강의를 하기 위해 참석한다. 사라예보는 발칸 반도 분쟁의 중심지이며 전쟁의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도시이며 제1차대전의 촉매제가 된 사라예보 사건의 도시이기도 하다. 많은 곳 중 이 도시를 배경으로 잡음은 곧 역사의 피해자들의 도시에서 현재를 바로 잡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극중에서 여기자는 사라예보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가 가능한 지역으로 보았다. 그녀는 그곳의 프랑스 외교관을 찾아가 프랑스 외교관이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그와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외교관으로서 정치 군사적 해법이 아닌, 계급, 민족, 국가 관념을 모두 제외한 단순한 인간으로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기 위함이다. 계급과 민족, 국가 중 하나라도 개입되면 이해관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대립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쳇바퀴 돌 듯 하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신에서는 어느 오래되고 버려진 듯한 건물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책들을 소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딘가에서 미대륙 원주민으로 추정되는 사람 두 명이 나타나 서류작업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인류의 평화에 대한 얘기를 토한다. 서구인들의 정복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로서 학살의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평등하게 태어나고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인간들이 서로 마주하여 평화를 이룩해야 할 것을 역설하지만 책상에 앉은 남자는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묵묵히 본인의 일을 하고 있고 한 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 원주민은 이미 죽은 사람과 다름없는 것이다. 서구 정복자들의 미대륙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만행은 이미 오래 전의 역사이며 그 당시 피해를 입은 자들은 이미 죽고 없다. 하지만 그 폐해는 여전히 그들의 후손들에게로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데 철저히 패권을 가진 자들의 관점에 입각하여 씌어진 역사책의 한편에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죄를 사하고 진정한 의미의 용서를 그들로부터 구하는 방법은 승자들의 역사는 모두 소각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감독은 강조하려는 것 같다.

고다르가 대학에서 텍스트와 이미지에 관해 강의를 할 때 중요한 말을 한다. 진실에는 두 얼굴이 있고 책을 쓰는 자들은 사물을 서술만 할 뿐이다. 아담의 언어는 바벨의 언어가 되어 언어는 제멋대로 현실의 사물을 분해한다. 고다르는 이미지의 이면에 있는 공허함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쇼트와 역쇼트로써 진실의 두 얼굴을 모두 다루고 보여주는 영화적 방법론을 제안한다. 1948년 유태인이 약속된 땅에 도착했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은 바다 속에 익사했다.

그리고 고다르의 강의를 듣던 한 러시아 혈통의 유대계 프랑스인 올가가 자살한다. 그녀는 예루살렘의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죽는 순간 평화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이스라엘인이 있다면 기쁘다고 했으나 결국 그녀 혼자 남았다. 유태인이나 러시아 혈통이며 프랑스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순교자가 되었다. 그녀가 죽고 도착한 곳은 미국 해병대가 지키고 있는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 어느 해변이다. 하지만 올가는 저 멀리 까지 보았지만 그녀가 간 곳은 훨씬 먼 곳이었다. 고다르는 세계평화와 그 방법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지만 결국 어떻게 될지에 대해선 확답을 주지 않았다.


Conversation, Blow up 영화

영화에서 청각의 요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무성 영화 시절에도 소리는 없어도 배경음악 정도는 깔아야 했던 만큼 소리를 결여한 영화는 상상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아무리 무서운 영화를 보더라도 소리를 꺼놓고 볼 때면 우스꽝스럽게만 보이고 긴장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공포를 조성하는 것의 거의 9할 이상을 다름 아닌 소리가 담당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기실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영화답게 해주는 결정적인 요소에는 역설적이게도 카메라에 담긴 보이는 것과 더불어 카메라의 앵글 밖에 있는 보이지 않은 것이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거나 믿는 데서 느끼는 공포나 불안, 즉 미지의 세계의 어떤 흥미로운 부분을 잘 포착하여 다루었을 때 누구든지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가 된다. 공포와 불안은 그 대상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 몰이해와 무지는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서 말한 법칙은 특히 스릴러에서 주효하다고 본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수단은 소리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특히 공포와 스릴러 영화에서 청각적 요소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내러티브 영화는 프레임 안의 것들을 다룸으로써 동시에 프레임 밖의 것들도 다루는데 프레임 안, 즉 카메라 앵글에 들어온 것들 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루지 않는 영화는 상상하기가 힘들다. 스토리의 전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흥미로운 전개를 위해서는 당장은 볼 수 없으며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어느 존재, 귀신이나 살인마, 괴물, 음모와 같은 것들을 상정해 놓는 것이 필수다.

 영화 <컨버세이션>은 주인공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살인 음모를 규명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는데 주요 테마를 도청으로 잡은 것은 따라서 아주 훌륭한 선택이다.

도청 전문가 해리 콜은 어느 회사의 비서로부터 사장의 아내와 그의 정부의 공원에서의 대화를 도청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최첨단 장비를 이용하여 녹취한 후 작업실에서 그것을 분석하다가 그들을 둘러싼 음모가 있음을 알게 되고 의뢰인에게 자료를 주지 않은 채 그 전말을 알아보기 위해 더욱 파고들어간다.

해리 콜은 녹취록의 중간 중간에 있는 간극, 소음 때문에 확실히 들리지 않는 부분을 복원하기 위해 테이프를 끊임없이 재생하며 기계를 이용하여 소리를 조작한다. 트레블과 베이스를 조절하고 회로를 바꾸어 여러 가지의 필터를 통과시켜 흐릿한 대화를 명료하게 만듦으로써, 거기에 있지만 지각되지 않은 존재, 소리를 규명한 것이다. 불필요한 요소 잡음을 치워내고 필요한 부분만 취하여 완성된 소리를 재구성하는 과정은 흡사 추리극의 전개의 축소판과도 같아 보인다.

타인의 대화를 도청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음에도 역설적으로 정작 본인은 다른 사람과의 긴 대화는 매우 꺼려하는 것은 도청 기술의 뛰어남과 그 무서움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행여 자신이 그 기술에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파라노이아를 갖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일지라도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고(아예 집 전화가 없다고 할 따름이다) 집 주소도 알려주지 않고 집에는 온갖 방범장치 등을 장착해 놓는 등 타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보임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철저히 애를 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해리 콜이 집에 있을 때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지 않고 콜이 프레임 밖에 있을 때도 가만히 있으며 다만 천천히 패닝할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감시카메라의 화면과 같다. 해리 콜은 언제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빤히 보고 있는 카메라 앞에서 바지를 벗는다. 결국 그 역시 누군가에 의해 엿보이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해리 콜이 영화 말미에 대화에서 엿들은 약속 장소 호텔 방의 옆방에서 도청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정확히 무슨 일이 거기서 일어났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소리로써 넌지시 알려줄 뿐인데 해리 콜의 시점에서 그 역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엿듣기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같은 입장에서 해리 콜이 갖고 있던 확신-두 연인은 살해당할 것이다-를 공유하며 화장실 너머에서 들린 소란으로써 그 확신에 확신을 더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확신의 정반대의 상황이었다는 반전은 어떤 것의 본질을 알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감각에는 모종의 위계질서가 있으며 청각은 시각에 열등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안토니오니 감독의 <욕망>(원제:Blow-Up)<컨버세이션>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사건이 으로써 발생한다. 주인공 토마스의 직업은 사진작가로서, 오로지 들리는 것만 취급하는 도청전문가와 달리 오직 보이는 것만 다룬다는 점에서 극명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사진작가 토마스는 어느 날 그의 작품집을 완성 짓기 위해 도심의 풍경을 찍으러 다니는데 우연히 어느 공원에서 다정해 보이는 연인을 보고 그들의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사진이 찍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본인의 모습이 담긴 필름에 집착을 보여 이상한 낌새를 의심한 토마스는 그녀에게 엉뚱한 필름을 주고 사진을 현상한다.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한 그는 더 확실히 보기 위해 그 부분을 확대하고 확대한 부분을 더욱 확대해 본다. 그 과정에서 숲속에 숨은 총을 든 남자와 시체 한 구를 찾아낸다.

비약이겠지만, 두 영화 <컨버세이션><블로우 업>에서 주인공이 의문점의 본질로 다가가는 과정을 나는 각각 내러티브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메타포로서 이해한다. 전자는 불필요한 노이즈를 제거하고 필터링 함으로써 지각되지 않던 존재로의 접근을 보여주는 반면 후자는 이미 지각된 것으로, 확대로써 깊이 파고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흥미롭게 시작해서 흥미롭게 끝나는데. 사건이 해결되는 게 흥미롭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공원에서 찍힌 시체와 그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유지하지 않은 채, 사건의 전말에 대한 일말의 힌트도 암시해주지 않은 채 끝이 난다. 애초에 <블로우 업>의 주인공 토마스는 <컨버세이션>의 해리 콜과는 달리 공원의 여자의 음모를 캐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기에, 그야말로 우연히 사진에서 시체를 발견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에 개입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두 모델과 즐거운 밤을 보낸 뒤 토마스는 밖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 나가는데 그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공터에서 우연히 단체로 마임을 하는 사람들과 맞닥뜨리는데 그들은 테니스장에 들어가 테니스를 치는 시늉을 한다. 그런데 단순히 시뮬레이션으로서 시늉이 아닌, 그들은 정말로 테니스를 치는 것처럼 행동한다. 다만 공과 라켓이 안 보이며 소리가 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공이 테니스장 밖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마침 구경하던 토마스에게 공을 던져주라고 진지하게 요구한다. 토마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애초에 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과 공이 있는 척 그것을 주워서 테니스장 안으로 던지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를 택하는 행위는 즐거운 분위기를 깨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 옷을 입지 않고 행차하는 임금을 보고 백성들은 어안이 벙벙하지만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될 거 같아 모두 침묵한다. 누군가가 임금은 사실 벌거벗었다고 선언하면 사람들은 몰랐던 사실을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짜증을 느낄 것이다. 백성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기에, 그것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단지 공허한 계몽일 따름이다


세브린느 belle de jour 영화

 

이 영화에는 배경음악이 한 개도 없다. 상황의 극적 전개의 강조 혹은 인물의 심리상태의 재현을 위해 사용되는 음악이 전혀 없이도 주인공 세브린느의 심리를 잘 알 수 있었던 것은 마치 배경음악처럼 예고 없이 그녀의 무의식 세계가 현실의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데에 있다. 성적인 상징성과 사디즘, 마조히즘으로 점철된 그녀의 무의식 세계는 마치 유아기적 꿈처럼 명료하며 애매모호하지 않다. 영화의 처음부터 세브린느의 환상 속에서 남편과 함께 마차를 타는데 말의 걸음걸이의 리드미컬함은 성행위를 암시하며 채찍을 든 마부에게는 사도 마조히즘적 환상이 투영되어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세브린느는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하는데 고통스럽기보다는 그 신음이 쾌감에서 나온 것으로 들린다. 그녀의 무의식이 이토록 자극적인 성 욕구를 갖게 된 데에는 그녀의 욕구불만과 권태가 극에 달했기 때문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젊고 건강하며 멋진 집에서 가정부까지 고용할 수 있을 만큼 경제력도 좋은 남편 피에르를 두고도 욕구불만에 사로잡힌 까닭은 무의식에 침잠한 어린 시절의 성추행의 기억의 영향으로 남편이 동침을 요구할 때마다 히스테리를 일으킨 탓이다. 그녀에게 섹스는 모종의 금기가 되어버렸고 따라서 결혼한 지 1년이 다 되어서도 침대를 따로 써 제대로 된 성적 만족을 갖지 못한 것이다. 세브린느는 그녀의 친구가 밤에 매음굴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에, 아직까지 매음굴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혐오를 느끼지만, 금기의 대상은 금지됐다는 사실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에 그녀의 무의식에서는 오히려 강력한 성 욕망이 잠재해 있어 매음굴에 큰 호기심을 갖게 된다.

잇송으로부터 주소를 듣고 한 고급 요정에서 일하게 된 세브린느는 다양한 고객들을 만난다. 유쾌한 공장주, 피학적 성향의 의사, 시간증의 귀족, 건달 마르셀과 남편의 친구 잇송까지 인종과 계급을 막론한 고객들에게서 도출되는 공통점은 그들 나름대로의 성적 환상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요정을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서의 실현이 아닌 시뮬레이션으로서의 재현이다. 누군가의 하녀, 공작부인, 죽은 아내, 연인이 될 수는 없지만 매춘부는 그것을 흉내 냄으로써 고객들의,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대리 충족시켜주는 이를테면 꿈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요정에서 세브린느가 유난히 고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다른 동료들보다 얼핏 봐도 기품이 있어 보이는 탓인데 정숙하고 품위를 지키는, 어딘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성의 껍데기를 깨고 그 안의 포장되지 않은 본성을 끄집어내고픈 사디즘적 욕구에 기인한다. 고객 중 의사가 공작부인으로부터 능욕을 당하는 것을 즐기는 것 역시 이러한 욕구의 연장이다.

세브린느는 환상의 재현 그리고 스스로 환상 그 자체가 됨으로써 본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남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포주와 성노동자들 간의 유대는 깊고 행복해보이며 그곳의 가정부와 그녀의 딸도 그들과 아주 잘 지낸다. 감독은 이렇듯 성노동에 대한 옹호의 시선을 견지한다. 그런데 세브린느의 사랑의 재현을 실제의 것으로 받아들인 마르셀이 질투심에 못 이겨 피에르를 총으로 쏜다. 피에르는 식물인간이 되어 영화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지막 장면이 세브린느의 환상인지, 아니면 남편이 잠시 동안 식물인간이 된 척 했던 것인지(한 포털사이트의 영화 소개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를 분명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맥락상 행복한 결말을 암시하는 엔딩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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