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청각의 요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무성 영화 시절에도 소리는 없어도 배경음악 정도는 깔아야 했던 만큼 소리를 결여한 영화는 상상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아무리 무서운 영화를 보더라도 소리를 꺼놓고 볼 때면 우스꽝스럽게만 보이고 긴장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공포를 조성하는 것의 거의 9할 이상을 다름 아닌 소리가 담당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기실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영화답게 해주는 결정적인 요소에는 역설적이게도 카메라에 담긴 보이는 것과 더불어 카메라의 앵글 밖에 있는 보이지 않은 것이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거나 믿는 데서 느끼는 공포나 불안, 즉 미지의 세계의 어떤 흥미로운 부분을 잘 포착하여 다루었을 때 누구든지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가 된다. 공포와 불안은 그 대상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 몰이해와 무지는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서 말한 법칙은 특히 스릴러에서 주효하다고 본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수단은 소리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특히 공포와 스릴러 영화에서 청각적 요소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내러티브 영화는 프레임 안의 것들을 다룸으로써 동시에 프레임 밖의 것들도 다루는데 프레임 안, 즉 카메라 앵글에 들어온 것들 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루지 않는 영화는 상상하기가 힘들다. 스토리의 전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흥미로운 전개를 위해서는 당장은 볼 수 없으며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어느 존재, 귀신이나 살인마, 괴물, 음모와 같은 것들을 상정해 놓는 것이 필수다.
영화 <컨버세이션>은 주인공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살인 음모를 규명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는데 주요 테마를 도청으로 잡은 것은 따라서 아주 훌륭한 선택이다.
도청 전문가 해리 콜은 어느 회사의 비서로부터 사장의 아내와 그의 정부의 공원에서의 대화를 도청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최첨단 장비를 이용하여 녹취한 후 작업실에서 그것을 분석하다가 그들을 둘러싼 음모가 있음을 알게 되고 의뢰인에게 자료를 주지 않은 채 그 전말을 알아보기 위해 더욱 파고들어간다.
해리 콜은 녹취록의 중간 중간에 있는 간극, 소음 때문에 확실히 들리지 않는 부분을 복원하기 위해 테이프를 끊임없이 재생하며 기계를 이용하여 소리를 조작한다. 트레블과 베이스를 조절하고 회로를 바꾸어 여러 가지의 필터를 통과시켜 흐릿한 대화를 명료하게 만듦으로써, 거기에 있지만 지각되지 않은 존재, 소리를 규명한 것이다. 불필요한 요소 잡음을 치워내고 필요한 부분만 취하여 완성된 소리를 재구성하는 과정은 흡사 추리극의 전개의 축소판과도 같아 보인다.
타인의 대화를 도청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음에도 역설적으로 정작 본인은 다른 사람과의 긴 대화는 매우 꺼려하는 것은 도청 기술의 뛰어남과 그 무서움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행여 자신이 그 기술에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파라노이아를 갖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일지라도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고(아예 집 전화가 없다고 할 따름이다) 집 주소도 알려주지 않고 집에는 온갖 방범장치 등을 장착해 놓는 등 타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보임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철저히 애를 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해리 콜이 집에 있을 때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지 않고 콜이 프레임 밖에 있을 때도 가만히 있으며 다만 천천히 패닝할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감시카메라의 화면과 같다. 해리 콜은 언제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빤히 보고 있는 카메라 앞에서 바지를 벗는다. 결국 그 역시 누군가에 의해 엿보이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해리 콜이 영화 말미에 대화에서 엿들은 약속 장소 호텔 방의 옆방에서 도청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정확히 무슨 일이 거기서 일어났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소리로써 넌지시 알려줄 뿐인데 해리 콜의 시점에서 그 역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엿듣기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같은 입장에서 해리 콜이 갖고 있던 확신-두 연인은 살해당할 것이다-를 공유하며 화장실 너머에서 들린 소란으로써 그 확신에 확신을 더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확신의 정반대의 상황이었다는 반전은 어떤 것의 본질을 알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감각에는 모종의 위계질서가 있으며 청각은 시각에 열등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안토니오니 감독의 <욕망>(원제:Blow-Up)은 <컨버세이션>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사건이 ‘봄’으로써 발생한다. 주인공 토마스의 직업은 사진작가로서, 오로지 들리는 것만 취급하는 도청전문가와 달리 오직 보이는 것만 다룬다는 점에서 극명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사진작가 토마스는 어느 날 그의 작품집을 완성 짓기 위해 도심의 풍경을 찍으러 다니는데 우연히 어느 공원에서 다정해 보이는 연인을 보고 그들의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사진이 찍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본인의 모습이 담긴 필름에 집착을 보여 이상한 낌새를 의심한 토마스는 그녀에게 엉뚱한 필름을 주고 사진을 현상한다.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한 그는 더 확실히 보기 위해 그 부분을 확대하고 확대한 부분을 더욱 확대해 본다. 그 과정에서 숲속에 숨은 총을 든 남자와 시체 한 구를 찾아낸다.
비약이겠지만, 두 영화 <컨버세이션>과 <블로우 업>에서 주인공이 의문점의 본질로 다가가는 과정을 나는 각각 내러티브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메타포로서 이해한다. 전자는 불필요한 노이즈를 제거하고 필터링 함으로써 지각되지 않던 존재로의 접근을 보여주는 반면 후자는 이미 지각된 것으로, 확대로써 깊이 파고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흥미롭게 시작해서 흥미롭게 끝나는데. 사건이 해결되는 게 흥미롭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공원에서 찍힌 시체와 그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유지하지 않은 채, 사건의 전말에 대한 일말의 힌트도 암시해주지 않은 채 끝이 난다. 애초에 <블로우 업>의 주인공 토마스는 <컨버세이션>의 해리 콜과는 달리 공원의 여자의 음모를 캐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기에, 그야말로 우연히 사진에서 시체를 발견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에 개입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두 모델과 즐거운 밤을 보낸 뒤 토마스는 밖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 나가는데 그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공터에서 우연히 단체로 마임을 하는 사람들과 맞닥뜨리는데 그들은 테니스장에 들어가 테니스를 치는 시늉을 한다. 그런데 단순히 시뮬레이션으로서 시늉이 아닌, 그들은 정말로 테니스를 치는 것처럼 행동한다. 다만 공과 라켓이 안 보이며 소리가 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공이 테니스장 밖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마침 구경하던 토마스에게 공을 던져주라고 진지하게 요구한다. 토마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애초에 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과 공이 있는 척 그것을 주워서 테니스장 안으로 던지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를 택하는 행위는 즐거운 분위기를 깨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 옷을 입지 않고 행차하는 임금을 보고 백성들은 어안이 벙벙하지만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될 거 같아 모두 침묵한다. 누군가가 임금은 사실 벌거벗었다고 선언하면 사람들은 몰랐던 사실을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짜증을 느낄 것이다. 백성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기에, 그것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단지 공허한 계몽일 따름이다.
최근 덧글